건축물이나 예술에 폐허가 의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메너리즘기부터 바로크기에 걸쳐서이다. 19세기 영국과 독일에서도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페허에 관심이 집중되었고,고대유적을 판화와 회화에 그리는 것이 유행하였다. 폐허가 어딘지 기묘하지만 아름다운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폐허취미로써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퍼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건축물을 일부러 파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정원에 파괴되어진 폐허 건축물을 설치하여 폐허정원이 관광명소가 되기도 하면서 폐허는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사회가 근대화되면 될수록, 폐허 속에서 미학적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 증가하는 것일까?
정교하게 설계된 정원과 썩어버려진 체로의 폐허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폐허정원은 독특한 시간을 담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나타남으로써 표출되는 시간의 차이에 독자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런 차이가 보는 사람에게 쾌락을 안겨주는 것일까? 폐허라는 먼 과거를 현재의 정원의 시간에 접근시킨다. 혹은 현재를 폐허라는 과거의 영역에 멀리 떼어두는 원(遠)/근(近)의 시간조작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스텔지아와 동경, 감상적인 공허감마저 생기게한다. 폐허의 기념물과 폐허정원에는 원(遠)/근(近)이라는 이중적 시간과 그 시차가 도입되어진다. 실제의 폐허에서 가지고 온 기둥과 조각, 인공적으로 썩게 한 신전에 작은 모형과 동굴을 기하학적으로 설계한 정원안에 두는 것으로 정밀하게 설계된 정원과 썩어 낡은 폐허 사이에 시간의 차이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벤자민은 바로크적 미학은 자연이 경과한 후의 폐허인것 같다고 말했지만, 중세 이후 유럽인들은 자연과 직접 맞서 부딪칠수 없었고, 폐허는 자연이 남긴 흔적으로밖에 느낄수 없었다.
폐허라는 개념을 개입시키지 않고는 중세인들은 더 이상 자연과 대면하는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것이다.자연과 인간사이에 바이어스의 존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이런 바이어스 역할을 하는 폐허는 단순히 낡은 쓰레기가 아니라 현실의 일부가 흔적으로 남아, 남은 자취 흔적을 모아 쌓여서 폐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그래서 폐허=세부 흔적의 집적이라고 바이어스의 개념을 도입해서 현실을 보는 것은 다분히 사진적인 견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진은 세계를 흔적이라는 이름의 폐허로 변질시킬 수 있다. 바로크미학을 폐허로 보는 것은 사실은 사진의 경우가 아닐까? 바로크적 미학은 사진보다 앞서서 세계가 조화된 통일질서로 성립된것이 아니라,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부조화의 흔적이 모여 폐허로 변질되어 간다고 예감했던 것일까?
일그러지고 뒤틀린 부조화스러운 세부 흔적들이 모여있는 폐허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을 예감한 것일까요?
썩어가는 폐허는 마치 음악 같기도 합니다. 소리를 낸 순간부터 소리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폐허가 언젠가 썩어 문드러져서,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하는 소멸의 프로세스와 같은 공통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소멸하는 예술이며, 에릭 돌피(Eric Dolphy)의 "소리는 내는 순간에 공중에 사라진다” 라는 말처럼, 소실을 막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예술인 사진으로 폐허를 찍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요? 폐허는 음악과 같이 멈추는 것이 불가능 합니다. 소멸에의 프로세스가 정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폐허도 음악도 아닌 것 입니다. 폐허를 찍고 그것을 인화지에 정착하게 하는 것은 애초에 그 행위 자체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않으면 사진도 또한 음악처럼 폐허를 표현하는 매체가 아니라, 폐허 그 자체와 같은 존재일까요? 세계를 흔적으로 표출하는 사진은 확실히 폐허적인 존재입니다. 사진이 폐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사진도 또한 폐허처럼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는 걸까요?
폐허에는 미래를 향해 썩어 없어질 것이라는 예감과, 폐허가 지금 거기에 있다는 현재와, 폐허 그 것이 가지고 있는 붕괴된 과거의 역사라는 세 개의 시간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세 개의 시간을 토대로 성립하고 있는 폐허는 세 개의 갈라진 시간 감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세 개 영역의 관계의 틀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재가 아니라면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닌 것처럼, 폐허는 하나의 시간 영역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폐허는 그래서 과거와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의 차이, 그것은 다른 시간들의 관계 차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폐허는 실체로써 그 가치를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라, 일상에서 복수화된 시간의 차이와 그 관계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폐허가 가지고 있는 붕괴의 역사는 현재와의 시간 차이에서 처음으로 그 가치를 드러내고, 게다가 미래를 향해 썩어가면서 미래와의 관계에 따라서도 표현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세 개의 영역 속에서 허공에 매달려 있는 존재가 폐허인 것은 아닐까 요! 사진도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죽어 가고 있는" (로랑 바르트, "밝은 방" 프로세스를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항상 다양한 시간의 모습의 허공에 매달려 있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어 가고 있는" 사진은 소멸이라고 하는 프로세스를 품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폐허를 찍고, 그것을 영원히 정착시키는 예술이라기보다는 폐허 그 자체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사진은 그래서 시간을 멈추는 예술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하는 다양한 시간을 도입한 예술은 아닐까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 위하여 사진을 찍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찍은 모든 피사체에 언젠가 소멸한다는 프로세스를 도입한 것입니다. 도몬켄도“불상은 달리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멈춰 있는 대상은 없으며, 대상은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쇠처럼 최종적으로는 소멸과 폐허를 향해 계속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폐허와 사진은 그런 동적인 시간의 프로세스를 내부에 끌어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폐허는 폐허가 되기 위한 과정이며, 썩어서 소멸하기 위하여 계속 움직이는 프로세스입니다. 폐허에 완성형은 없습니다. 완성된 폐허라고 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소멸된 것이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이는 폐허는 늘 하나의 프로세스로서 존재하는 유동적인 폐허 입니다. 하지만 그런 붕괴의 역사가 없는 20세기 이후 도시의 폐허에 그런 동적인 시간이 존재할까요? 바로크적 미학에 준거하는 오오야마 마사시의 사진은 폐허가 그런 역사와 프로세스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찍은 폐허에는 그러한 역사와 프로세스가 배제되고 있습니다. 오오야마의 사진에는 플랫화 되고, 모든 세부적인 것들이 동질화된 80년대 이후 도시의 모습에 정확히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0세기 이후의 도시에 과거와 기억과 역사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 곳에는 지금 밖에 없는 무시간으로서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장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쟁에 의해 폐허화된 도시가 시사하는 것은 도시에 기억과 역사는 존재하지 않고, 바로크시대의 인공적 폐허와 신전의 폐허와는 완전히 다른 잡동사니화된 비역사적 건물의 잔해로서의 폐허였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80년대 버블에 의한 도시 재개발 운동은 도시의 폐허에는 아무런 역사적 단편도 존재하지 않으며, 공허하고 잡동사니의 집적에 불과한 무의미한 폐허인 것을 증명했습니다. 거기에는 향수도 없으며, 기억도 없었습니다. 하루 밤만에 건물이 허물어지고, 공터가 된 도시의 거리에는 폐허가 갖고 있던 서서히 붕괴해 가는 완만한 과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오오야마 마사시의 사진에는 그러한 과정이나 폐허가 갖고 있을 법한 붕괴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장의 기계가 잡동사니와 같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을 뿐, 거기에는 어떠한 감탄도 없습니다. 이전의 폐허에는 역사라는 기억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만, 그의 사진에는 그러한 기억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기억이 결여된 폐허에는 현재와 비교되는 과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대비로 인해 생겨나는 시간적인 격차가 존재하지 않고, 그가 찍은 폐허는 폐허로서의 가치를 표출할 수 없습니다. 폐허가 아니라 그것은 단순히 잡동사니 더미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성이 결여된 잡동사니 더미가 바로크적인 폐허의 미학으로 분장 할 때에는 기묘한 뒤틀림이 보여집니다. 기억과 역사와 과거를 가지지 못한 잔해가, 어떤 모종의 미학을 꾸미려 할 때 나타나는 조잡함이라고나 할까요. 라이카의 렌즈로 정밀하게 사물이 묘사되면 묘사될수록 돌출된 세부를 가지지 않은 조화롭고 비뚤어지지 않은 바로크 라고 하는 그러한 의문점이 강조되어질 뿐입니다.
매일 신문이나 영상으로 세계속의 민족, 종교전쟁에 의한 대량의 폐허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바로크 정원의 폐허 보마루츠오의 사쿠로·보스코라고하는 고전적인 폐허는 지금은 조잡한 것에 불과하겠죠. 이슬람국에 의한 고대유적이 하루하루 파괴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폐허의 미학에는 더 이상 어떠한 감개도 품을수 없습니다. 고대 유적을 파괴한 흔적이 왠지 평소의 해체현장과 같아 보여지는 시대입니다. 이전의 풍요롭고 윤택한 시간을 갖고 있던 폐허가 언제부턴가 시간이 폐기되어 아무런 내용도 없이 공허한 버블기 도쿄의 공터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오야마의 사진에는 시간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공장이 타버리고 난 후의 기계와 부품이 바로크적인 조각처럼 나타나 있어도, 거기에는 바로크적 폐허 특유의 시간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공장과 기계가 갖고 있던 역사와 기억도 느낄 수 없습니다. 역사와 기억이 결여된 불 타버린 자리의 폐기물이 바로크적 미학을 비웃는 듯 조각상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루트비히 3세의 성의 공원에 있는 조각도 놀랄 정도로 아무런 내용이 없는 미학입니다.
그 내용이 없고 공허한 오오야마가 찍은 폐허에 알베르트 슈페어가 건축한 제페린 펠트와 같이 공허함을 느껴게 되는 것입니다. “폐허의 법칙”으로부터 만들어진 제페린 펠트에는 과거도 없으며 기억도 없습니다. 시간의 모습을 포기한 제페린 펠트에는 폐허를 위해 폐허를 완성시키는 것일 뿐 폐허는 더이상 역사와 기억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폐허는 폐허를 모방하는 것으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이 제페린 펠트는 시간을 무화시키는 것으로 천년 제국으로서의 독일에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합니다. 슈페어가 말하는 “폐허의 법칙”은 최종적으로 폐허가 목표로 하는 “죽음”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서 소멸된다는 미래의 죽음을 선취하는 “폐허의 법칙”은 죽음이나 소멸을 의태하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획득, 불로불사를 꾀하는 것입니다. 동물적으로 썩어 짓무른 죽음을 지향하는 바로크식 폐허와 그것은 대립하는 것입니다.
슈페어의 붕괴된 적이 없는 폐허는 불로불사라는 방부제를 듬뿍 주입한 모택동의 시신을 상기시키는 폐허입니다. 매끈매끈한 표정에서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그 시체는 완전히 평평하게 되어 전부가 동질하게 된 미나미 오오사와나 다마센터같은 도쿄 교외와 흡사하지 않을까요? 버블기 이후의 폐허는 오오야마가 찍은 폐허처럼 모든 것이 세세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조화로운 구도 속에서 좀비처럼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버블기의 도시계획은 도쿄도 아래의 산타마 지구에서 가장 난잡했던 타치카와를 백화점과 맨션, 4차선의 도로와 주차 공간으로 변화 시켰습니다. 제페린 펠트와 같은 타치카와의 완전한 평면화는 무엇을 위해 행해진 계획이었는가는 예전이나 지금까지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타치카와의 평면화는 버블 이후의 일본의 전형적인 광경으로, 그것은 제펠린 펠트와 같이 시간이 결허된 폐허이지는 않을까요? 흔적을 소실한 세부의 집적 그것은 현재밖에 없는 폐허입니다. 그것은 잡동사니도 잔해도 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폐허입니다. 폐허를 위한 폐허로 마치 폐허의 패러디 같습니다. 폐허가 다양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난잡한 집합체에서 공허한 제펠린 펠트적인 폐허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폐허가 가지고 있던 세부의 돌출이 평탄하며 동일한 것으로 균일화 해 가는 것입니다.
바로크 예술이 세부의 기묘함이나 부조화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면 오오야마의 사진은 섬뜩할 정도로 조화롭습니다. 오오야마 사진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든 균질화하는 디지털 기능의 철저한 사용에 의해 바로크로부터 노이즈를 배제시킨 조화로운 바로크라는 새로운 미를 성립시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크적 폐허가 성립되는 근거로서의 시간의 낙차를 제거하고 현재뿐인 무시간성을 폐허에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흔적을 소멸한 균등화된 세부의 집적이라고 하는 오오야마 마사시의 사진은 현재 도시 광경의 어딘가에서 동기화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가 , 카네무라 오사무
* 한국어 번역: 김 은희